유정 (승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정(惟政)은 임진왜란 시기 승병을 이끌고 강화 교섭에 참여한 조선의 승려이다. 1544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13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발발 후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모아 활약했으며, 명나라 장수와 협력하여 평양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는 울산왜성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1604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 회담을 맺고 포로 3500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이후 가야산에서 사망했으며, 표충사 등에 배향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유정 (승려) - 사명로
사명로는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에서 밀양시 무안면을 연결하는 도로로, 지방도 제1080호선과 일부 중복되며 무안초등학교, 밀양무안우체국, 무안농협 등의 주요 경유지를 포함하고 종점에서는 국도 제24호선과 이어진다. - 조선의 선승 - 휴정
휴정은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활약했으며, 조선 불교 중흥에 기여하고 종교 간 화합을 강조한 승려이다. - 조선의 선승 - 만공 (승려)
만공은 송도암이라는 본명과 월면이라는 법명을 가진 조선 말기 및 일제강점기의 승려로, 경허의 제자로서 한국 선불교 중흥에 기여하고 불교 교육 근대화와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일제강점기 조선 불교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다.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외국인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외국인 - 김성일 (1538년)
김성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이황의 제자이며, 조선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하여 임진왜란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병사, 경상도 초유사,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유정 (승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사명대사 |
법명 | 유정(惟政) |
당호 | 사명당(泗溟堂) 또는 사명(四溟堂) |
속명 | 임응규(任應奎) |
자 | 이환(離幻) |
호 | 송운(松雲) 또는 종봉(鍾峯) |
시호 |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
생애 | |
출생 | 1544년 10월 17일, 조선 경상도 밀양 |
입적 | 1610년 10월 12일 (향년 65세), 조선 경상도 합천 해인사 |
출가 | 1559년 직지사 |
학력 및 사상 | |
종파 | 선종 |
스승 | 신묵(信默), 휴정 |
가족 | |
아버지 | 임수성(任守成) |
활동 | |
직업 | 승려, 의병장 |
저서 | |
저서 |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 |
기타 | |
관련 정보 | 임 |
관련 링크 |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2. 생애
1544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임수성(任守成)의 아들로 태어났다.[3] 일찍 부모를 여읜 사명당은 13세에 황여헌(黃汝獻)을 사사(師事)하다가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 선(禪)을 받아 승려가 되었고, 거기에서 불교의 오의(奧義)를 깨달았다.[3] 1561년(명종 16)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당시의 학자·대부·시인들이었던 박사암(朴思菴)·허하곡(許荷谷)·임백호(林白湖) 등과 교제하였다. 1575년(선조 8) 선종(禪宗)의 주지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청허(淸虛)대사에게서 성종(成宗)을 강의 받고 크게 각성하였다. 금강산 보덕사에서 3년을 지내고, 다시 팔공산·청량산·태백산 등을 유람했으며, 43세 때 옥천산 상동암(上東菴)에서 하룻밤 소나기에 뜰에 떨어진 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문도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참선하였다. 46세에 오대산 영감란야(靈鑑蘭若)에 있다가 역옥에 죄 없이 걸렸으나 무죄 석방되어 금강산에서 3년 동안 지냈다. 18세에 승과(僧科)에 합격하고, 직지사의 주지가 된 후, 묘향산의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어 3년간의 고행 끝에 31세에 대오(大悟)를 얻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유정은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모아 순안에서 휴정의 휘하에 들어가 활약하였다.[1] 휴정이 고령으로 은퇴한 뒤에는 승군(僧軍)을 통솔하고 류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들과 협력하여 평양을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1] 또한 권율과 함께 경상도 의령에 내려가 여러 전공을 세워 당상(堂上)에 올랐다.[1] 일본군은 불교가 조선에서 억압받는 종교이기에 왜와 가깝다고 여겨 사찰을 훼손하지 않았으나, 승군이 의병으로 봉기하자 사찰을 훼손하기 시작하였다.
1594년에는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과 협력하여 가토 기요마사를 울산 진중으로 세 번 방문, 일본군의 동정을 살폈다.[1] 이후 조정에서 환속을 권유했으나 거부하고, 영남 지역의 팔공산, 용기, 금오 등의 산성을 쌓고 양식과 무기를 비축한 뒤 인신(印信)과 전마(戰馬)를 바치고 산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1]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명나라 장수 마귀를 따라 울산왜성 전투에 참전하였고,[1]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을 따라 순천왜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가선동지중추부사(架善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1]
분류:임진왜란 관련자
1604년(선조 37) 유정은 국서를 받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후시미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었다.[1] 이 회담은 일본과 조선의 국교 회복에 큰 역할을 했으며, 이후 12차례에 걸친 조선통신사(1607-1811)를 가능하게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유정은 끌려갔던 조선인 포로 3500명을 데리고 귀국하였으며,[1] 가의(嘉義)의 직위와 어마(御馬) 등을 하사받았다.
임진왜란 당시 유정은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에 세 차례나 들어가 강화 교섭을 벌였다. 소니시 유키나가와 명(明)의 유격장군 심의경 사이에서도 독자적인 강화 조건이 논의되었으나, 소니시와 심의경은 조선을 배제하고 거짓 강화 조건을 본국에 전달했다. 기요마사-유정 라인의 강화 교섭은 그 자체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기요마사가 도쿠가와 히데요시에게 진실된 정보를 보고하여 소니시-심의경의 거짓 강화 구상을 좌절시켜 조선 측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조정은 피해자인 조선에서 먼저 강화 사절을 보내는 것을 주저했으나, 양국 모두 조기 강화를 원했기에 일본 무사들 사이에서 유명한 유정을 “탐적사(探賊使)”로 일본에 파견했다. 유정은 쓰시마(対馬)를 거쳐 교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회담을 가졌고, 그의 인품에 감복한 이에야스는 유정과 한시를 주고받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유정은 스승 휴정이 입적한 이듬해 묘향산에 들어가 스승의 영탑에 애도하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선조의 부보를 듣고 한양으로 달려와 배곡한 후, 광해군이 서변을 지키게 하려 하였으나 병을 얻어 응하지 못하고 가야산에 들어가 사망했다. 1610년 해인사(海印寺)에서 서거한 후,[2] 밀양(密陽)의 표충서원(表忠書院)과 용변현(龍邊縣)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2. 1. 임진왜란 이전
1544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임수성(任守成)의 아들로 태어났다.[3] 일찍 부모를 여읜 사명당은 13세에 황여헌(黃汝獻)을 사사(師事)하다가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 선(禪)을 받아 승려가 되었고, 거기에서 불교의 오의(奧義)를 깨달았다.[3] 1561년(명종 16)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당시의 학자·대부·시인들이었던 박사암(朴思菴)·허하곡(許荷谷)·임백호(林白湖) 등과 교제하였다. 1575년(선조 8) 선종(禪宗)의 주지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청허(淸虛)대사에게서 성종(成宗)을 강의 받고 크게 각성하였다. 금강산 보덕사에서 3년을 지내고, 다시 팔공산·청량산·태백산 등을 유람했으며, 43세 때 옥천산 상동암(上東菴)에서 하룻밤 소나기에 뜰에 떨어진 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문도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참선하였다. 46세에 오대산 영감란야(靈鑑蘭若)에 있다가 역옥에 죄 없이 걸렸으나 무죄 석방되어 금강산에서 3년 동안 지냈다. 18세에 승과(僧科)에 합격하고, 직지사의 주지가 된 후, 묘향산의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어 3년간의 고행 끝에 31세에 대오(大悟)를 얻었다.2. 2.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유정은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모아 순안에서 휴정의 휘하에 들어가 활약하였다.[1] 휴정이 고령으로 은퇴한 뒤에는 승군(僧軍)을 통솔하고 류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들과 협력하여 평양을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1] 또한 권율과 함께 경상도 의령에 내려가 여러 전공을 세워 당상(堂上)에 올랐다.[1] 일본군은 불교가 조선에서 억압받는 종교이기에 왜와 가깝다고 여겨 사찰을 훼손하지 않았으나, 승군이 의병으로 봉기하자 사찰을 훼손하기 시작하였다.1594년에는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과 협력하여 가토 기요마사를 울산 진중으로 세 번 방문, 일본군의 동정을 살폈다.[1] 이후 조정에서 환속을 권유했으나 거부하고, 영남 지역의 팔공산, 용기, 금오 등의 산성을 쌓고 양식과 무기를 비축한 뒤 인신(印信)과 전마(戰馬)를 바치고 산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1]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명나라 장수 마귀를 따라 울산왜성 전투에 참전하였고,[1]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을 따라 순천왜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가선동지중추부사(架善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1]
분류:임진왜란 관련자
2. 3. 임진왜란 이후
1604년(선조 37) 유정은 국서를 받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후시미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었다.[1] 이 회담은 일본과 조선의 국교 회복에 큰 역할을 했으며, 이후 12차례에 걸친 조선통신사(1607-1811)를 가능하게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유정은 끌려갔던 조선인 포로 3500명을 데리고 귀국하였으며,[1] 가의(嘉義)의 직위와 어마(御馬) 등을 하사받았다.임진왜란 당시 유정은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에 세 차례나 들어가 강화 교섭을 벌였다. 소니시 유키나가와 명(明)의 유격장군 심의경 사이에서도 독자적인 강화 조건이 논의되었으나, 소니시와 심의경은 조선을 배제하고 거짓 강화 조건을 본국에 전달했다. 기요마사-유정 라인의 강화 교섭은 그 자체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기요마사가 도쿠가와 히데요시에게 진실된 정보를 보고하여 소니시-심의경의 거짓 강화 구상을 좌절시켜 조선 측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조정은 피해자인 조선에서 먼저 강화 사절을 보내는 것을 주저했으나, 양국 모두 조기 강화를 원했기에 일본 무사들 사이에서 유명한 유정을 “탐적사(探賊使)”로 일본에 파견했다. 유정은 쓰시마(対馬)를 거쳐 교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회담을 가졌고, 그의 인품에 감복한 이에야스는 유정과 한시를 주고받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유정은 스승 휴정이 입적한 이듬해 묘향산에 들어가 스승의 영탑에 애도하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선조의 부보를 듣고 한양으로 달려와 배곡한 후, 광해군이 서변을 지키게 하려 하였으나 병을 얻어 응하지 못하고 가야산에 들어가 사망했다. 1610년 해인사(海印寺)에서 서거한 후,[2] 밀양(密陽)의 표충서원(表忠書院)과 용변현(龍邊縣)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3. 평가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4] 해인사에 홍제존자비(弘濟尊者碑)가 있다. 승려의 몸으로 국가의 위기에 몸소 뛰쳐나와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외교) 등 눈부신 활약은 후세 국민이 민족의식을 발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일본 측에서 유정(惟政)에 대한 평가가 높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과거 조선에서의 유정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근세 일본 사회에서는 '사절 승려(使僧)'가 정계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반면 조선에서는 사대부 계층, 즉 유교적 문관 관료가 정치를 독점하고 있었다. 사대부는 국난 속에서 승려 계층이 큰 공적을 세운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결과 유정에 대한 조선 국내의 평가는 부당하게 낮게 평가되었다.
최근 일본 및 한국 학계에서 유정에 대한 재평가의 분위기가 높아지고, 새로운 연구가 발표되기 시작했다.
3. 1. 긍정적 평가
일본 측에서 유정(惟政)에 대한 평가가 높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과거 조선에서의 유정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근세 일본 사회에서는 '사절 승려(使僧)'가 정계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반면 조선에서는 사대부 계층, 즉 유교적 문관 관료가 정치를 독점하고 있었다. 사대부는 국난 속에서 승려 계층이 큰 공적을 세운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결과 유정에 대한 조선 국내의 평가는 부당하게 낮게 평가되었다.최근 일본 및 한국 학계에서 유정에 대한 재평가의 분위기가 높아지고, 새로운 연구가 발표되기 시작했다.
3. 2. 부정적 평가
일본 측에서 유정에 대한 평가가 높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과거 조선에서의 유정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근세 일본 사회에서는 '사절 승려(使僧)'가 정계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반면 조선에서는 사대부 계층, 즉 유교적 문관 관료가 정치를 독점하고 있었다. 사대부는 국난 속에서 승려 계층이 큰 공적을 세운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결과 유정에 대한 조선 국내의 평가는 부당하게 낮게 평가되었다.최근 일본 및 한국 학계에서 유정에 대한 재평가의 분위기가 높아지고, 새로운 연구가 발표되기 시작했다.
4. 저서
- 《사명당대사집》
- 《분충서난록》
5. 관련 작품
1995년 KBS2에서 방영된 드라마 서궁에서 박병호가 유정 역을 연기했다. 2015년 KBS1에서 방영된 드라마 징비록에서도 박병호가 유정 역을 연기했다.
6. 관련 문화재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는 보물 제1301호로 2000년 9월 28일에 지정되었다.
- 대구 동화사 사명당 유정 진영은 보물 제1505호로 2006년 12월 29일에 지정되었다.
-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은 중요민속문화재 제29호로 1973년 7월 16일에 지정되었다.
- 사명대사일본상륙행렬도팔곡병은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74호로 1990년 1월 16일에 지정되었다.
- 사명대사생가지는 경상남도 시도기념물 제116호로 1992년 10월 21일에 지정되었다.
참조
[1]
백과사전
Yu Jeong
http://enc.daum.net/[...]
[2]
웹사이트
For the Building of an Elysium
http://www.kcckp.net[...]
2006-09-27
[3]
웹인용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
2013-04-22
[4]
블로그
사명당집
http://zmanz.blogi.k[...]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